김경호 컬럼니스트
합동군사대학교 명예교수 / 법률사무소 호인 대표 변호사 / 굿투데이뉴스 김경호컬럼니스트
오늘날 대한민국 군대는 남군과 여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국 수호의 사명을 다하는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과정에서 전우애와 격려의 표현이 ‘강제추행’이라는 주관적 낙인과 뒤섞이며, 현장의 지휘관과 동료들은 혼란에 빠지고 있다. 선의의 격려가 범죄로 오인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부대 단결을 저해하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주관적 감정에만 기댄 무분별한 수사와 기소는 군 사법 전체의 신뢰를 위협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우리는 ‘성인지 감수성’의 중요성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대법원 판례(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74702 판결)가 명확히 밝혔듯, 위계 관계와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피해자가 즉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가해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특별한 사정’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낡은 통념을 버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정의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이 형사사법의 대원칙인 ‘증거재판주의’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뛰어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강제추행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해 행위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며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수도방위사령부보통군사법원 2019고20 판결 등 참조)해야 한다는 객관적 요건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주관적 불쾌감만으로 범죄의 성립을 단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객관성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최근 한 군사법원의 증인신문조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년 전 발생한 다수의 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피해자는, 변호인의 “2020년부터 2022년까지의 사건 발생 당시에도 신고를 원하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에 명확히 “예”라고 답했다. 이는 매우 중대한 법적 의미를 함축한다.
형법 제1조 제1항은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 시의 법률에 의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단순히 행위 시점의 법 조문을 적용하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범죄란 행위 당시에 그 위법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존재해야 성립하는 것이다. 수년이 지난 후, 피해자 본인 스스로가 당시에는 ‘신고할 의사가 없었다’고 인정하는 진술은, 그 행위가 과연 ‘강제’적인 방법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범죄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행위가, 시간이 흐른 뒤 다른 동료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범죄’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대법원의 기준, 즉 ‘논리와 경험칙에 부합하는 합리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진정한 군 기강 확립과 인권 보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잣대로는 이룰 수 없다. 성범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악이지만, 그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해서도 안 된다. 이제 우리 군은 피해자의 ‘뒤늦은 외침’에 담긴 특별한 사정을 존중하면서도, 행위 당시의 객관적 상황과 증거, 그리고 피해자 스스로 밝혔던 당시의 인식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균형 잡힌 판단 기준을 야전에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법치주의의 근간을 지키고, 신뢰받는 군 사법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