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컬럼니스트
합동군사대학교 명예교수 / 법률사무소 호인 대표 변호사 / 굿투데이뉴스 김경호컬럼니스트
남군과 여군이 함께 복무하는 병영 환경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그러나 이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동료애의 표현과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범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현장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무엇이 규율이고 무엇이 위법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한 명의 억울한 가해자도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감정적 대응이 아닌 헌법과 법률에 근거한 명확하고 상식적인 판단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
▶ 객관적 행위와 주관적 감정의 분리
‘강제추행’은 피해자의 주관적인 불쾌감만으로 성립하는 범죄가 아니다. 대법원 판례는 ‘강제추행’을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행위로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은 ‘객관성’과 ‘성적 자유 침해’이다. 피해자가 느낀 감정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자체로 범죄 성립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은 행위자와 피해자의 관계, 행위의 경위, 구체적인 행위 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다.
이는 함께 근무하는 군 동료 사이에서 더욱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상호 간의 격려나 친밀감의 표현으로 이루어진 신체 접촉이, 어느 순간 일방의 주관적 감정에 따라 ‘강제추행’으로 규정된다면 병영 내 신뢰 관계는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 맥락을 통해 본질을 꿰뚫는 ‘갈림의 포인트’
최근 무죄가 선고된 한 군사법원 판결(2021고51)은 이 ‘갈림의 포인트’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사건에서 후임인 여성 병사(피고인)가 선임이자 멘토인 여성 병사(피해자)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빈 행위가 강제추행으로 기소되었다.
만약 남성 상관이 여성 부하에게 같은 행동을 했다면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권력형 성범죄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은 달랐다. 재판부는 ▲피고인과 피해자 모두 여성이며, ▲피해자가 먼저 피고인의 엉덩이나 가슴을 만지는 등 친밀감의 표현으로 신체 접촉을 해 온 전례가 있다는 점, ▲피해자가 자신이 다른 사건으로 조사를 받게 되자 비로소 이 사실을 신고했다는 점 등을 종합했다. 즉, 법원은 이 행위가 성적 의도를 가진 ‘추행’이라기보다는, 상호 간에 형성된 관계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이며 추행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같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가슴을 찌르며 성적인 발언을 했다는 추가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이 떨어지고, 목격자가 이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하는 등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강제추행의 갈림길은 바로 ‘맥락’과 ‘증거’이다. 동일한 신체 접촉이라도 ① 성적 의도가 배제된 상호 관계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는가, ② 혹은 일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려는 명백한 의도와 행위가 있었는가에 따라 그 법적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피해자의 주관적 감정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 맥락과 일관된 증거가 없다면 형사처벌의 근거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