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컬럼니스트
합동군사대학교 명예교수 / 법률사무소 호인 대표 변호사 / 굿투데이뉴스 김경호컬럼니스트
대한민국 군대는 지금 ‘성(性)’ 문제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피해자의 눈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와 억울한 가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이 첨예한 대립 속에서, 우리는 감정의 영역을 넘어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에 근거한 적법하고 상식적인 ‘강제추행’의 판단 기준을 야전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제시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이는 진정한 피해자 보호와 군 조직의 안정을 위한 초석이다.
▶ 무엇이 ‘추행’을 결정하는가: 주관적 감정을 넘어선 객관적 잣대
강제추행죄의 성립 여부를 가르는 핵심은 피해자의 주관적 감정이 아닌, 행위의 ‘객관성’과 행위자의 ‘고의성’이다. 대법원 판례는 ‘추행’을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즉, 피해자가 성적 불쾌감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 죄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 자체가 사회 통념상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물론, ‘성인지 감수성’은 재판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피해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2차 피해의 두려움으로 인해 즉각적으로 저항하거나 일관된 진술을 하지 못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이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되지만, 그 진술이 주요 부분에서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객관적 증거와 경험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은 흔들릴 수 없다.
▶ '훈계'와 '추행'의 갈림길: 수원 안양지원 무죄판결의 시사점
이러한 법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한 남성 상급자가 관계가 껄끄러웠던 여성 부하직원을 불렀다. 부하직원이 컴퓨터만 쳐다보자, 상급자는 다가가 양손으로 어깨를 자신 쪽으로 돌리고 얼굴을 수 센티미터 앞까지 들이밀었다. 부하직원은 소스라치게 놀라 항의했고 상급자는 강제추행으로 기소되었으나,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의 갈림의 포인트는 어디였을까? 바로 행위의 맥락과 동기이다. 법원은 피고인의 행위가 성적 의도가 아닌, ‘자신을 보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에 화가 나 나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했다. 행위가 발생한 장소는 다른 직원들이 있는 공개된 사무실이었고, 어깨를 돌린 행위와 얼굴을 가까이 한 행위는 그 자체로 ‘객관적인’ 성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 어려웠다. 즉, 피해자에게는 극도의 불쾌감과 공포감을 준 행위였을지라도, 강제추행죄로 처벌하기 위한 ‘성적 의도’와 ‘객관적 추행 행위’라는 구성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당시 상황이 사적인 공간이었거나, 행위자가 성적인 발언을 했거나, 불필요하게 신체의 민감한 부위를 접촉했다면 판결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 사례는 모든 불쾌한 신체 접촉이 곧바로 강제추행이 되는 것은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행위의 전후 사정, 행위자의 의도, 행위 태양, 그리고 사회 일반의 시각을 종합하여 ‘성적 자유 침해’라는 본질에 해당하는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 결론: 상식과 법치에 기반한 군대 문화 정립을 위하여
남군과 여군이 함께 복무하는 환경에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필수적이다. 강제추행은 피해자의 주관적 감정만으로 재단되는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객관적 증거와 법리에 따라 판단되는 ‘법의 영역’이다.
군은 성범죄를 엄단하되, 모든 사안을 ‘성범죄’라는 단일한 프레임으로 재단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지휘관들은 분노나 질책의 표현이 부적절한 신체 접촉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며, 동시에 모든 장병은 주관적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객관적 상황 판단에 근거해 소통하고 행동하는 성숙함을 길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법치주의와 상식에 기반한 건강한 병영 문화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